F.A.

3 Dots

▪ 바비칸 지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공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던 곳을 재개발한 복합 문화공간이자 주거단지다.

▪ 바비칸의 브루탈리즘 디자인은 런던의 회복과 강인함을 상징하며 콘크리트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폐허에서 탄생한 새로운 도시 모델을 구현했다.

▪ 초기 많은 비판을 받았던 바비칸 센터는 현재 런던의 문화적 중심지이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예술과 문화 허브가 되었다.

 


 

템즈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다리들과 촘촘하게 솟아난 마천루, 그리고 수많은 관광객으로 혼잡한 런던의 전경 속에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이질적인 공간이 있다. 바비칸 지구(Barbican complex), 통칭 바비칸으로 불리는 이 단지는 매끈한 유리 파사드나 화려한 외관 장식으로 감싼 주변 빌딩과 달리 거친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사람들이 런던이라는 대도시를 떠올릴 때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을 법한 전형성을 벗어나는 풍경이다. 투박한 인상은 20세기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한, 노스탤직한 착각 혹은 아네모이아를 불러일으킨다. 

 

이곳을 더욱 독특하게 만드는 건 공간의 복합적인 쓰임이다. 문화생활과 거주 생활, 즉 공과 사가 뒤섞여 공존한다는 점은 바비칸만의 차별화된 매력 포인트다. 바비칸 지구를 대표하는 가장 큰 키워드는 예술이다. 지구 안에 위치한 바비칸 센터는 템즈강 남쪽에 위치한 사우스뱅크 센터(Southbank Centre)와 함께 런던 내의 핵심적인 복합 문화예술 센터로 잘 알려져 있다. 아트 갤러리와 공공 도서관, 영화관, 대규모 콘서트홀, 옥상에 위치한 온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집약적 공간이 가득하다. 길드홀 음악연극학교(Guildhall School of Music & Drama)와 런던 여학교 등의 교육기관 또한 자리 잡고 있으며, 단지 중앙에는 마치 수변공원처럼 인공호수와 녹지가 자리하고 있어 한가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거주민들을 비롯하여 외부 방문객들은 벤치에 앉아서 쉬거나 주변을 산책하고, 레스토랑 및 바에서 시간을 보내며 바비칸을 즐길 수 있다. 

 

동시에 바비칸은 약 4,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거대한 단지형 아파트이기도 하다. 메인 빌딩을 제외하고, 바비칸 내에는 여러 개의 블록에 걸쳐 2,000개의 플랏이 존재한다. 문화생활을 위해 방문한 시민들은 촘촘하게 자리한 창문들 사이로 크고 작은 화분, 널린 빨래, 혹은 요리하는 할머니 등 정겨운 일상의 풍경을 마주치게 된다. 정돈된 분위기의 공공문화시설과 익숙한 주거단지의 모습, 그리고 다양한 근린시설에 이르기까지 바비칸은 마치 런던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도시 같다. 그만큼 다양한 삶의 모습을 품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의 경계를 넘나든다.

바비칸 단지 내의 풍경 ⓒ Barbican
바비칸 지구 전경 ⓒ villiv

폐허에서 탄생한 유토피아

바비칸이 자리한 부지는 원래 크리플게이트(Cripplegate)라고 불렸던 곳으로 상인, 재단사, 양복점 등이 밀집해 있던 직물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런던 대공습으로 인해 중심가를 비롯한 인근 지역이 완전히 폐허로 전락했다. 이곳을 재건하기 위한 도시 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이 바로 지금의 바비칸 지구다. 사실 런던 중심가에서 이 정도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는 부지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남김없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공간 창조가 가능했다는 비극적인 아이러니다.

 

전쟁이 끝난 1951년의 바비칸 및 크리플게이트는 고작 주민 48명만이 남아있었을 정도로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런던시는 대대적인 재개발을 통해 황폐해진 도심지역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대책을 세웠다. 런던의 빈 곳들을 채우기 위한 해결책을 도모한 것이다. 금융이나 상업지구 등의 재개발은 직장인 등의 유동 인구만 증가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대규모 주거단지에 문화시설을 더해 매력적인 복합 신시가지를 만들어 주민들을 유치하려는 영리한 계획이었다. 

 

주변 경관과 확연히 구분되는 바비칸의 디자인적인 측면은 이러한 주민 유치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설계 및 총감독은 건축가 트리오 체임벌린, 파월 앤 본(Chamberlin, Powell and Bon)이 맡았다. 프로젝트 구상 자체는 194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구체적인 건축 계획은 1960년에 본격화되었다. 이들의 플랜은 기존의 지상 및 지하철 라인, 로마 시대 때부터 보존되어 온 성벽, 그리고 전후 흔적이 남은 교회 등의 보존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높은 주거 블록 설계를 포함한다. 즉 이들은 보존과 진보를 함께 추구하고자 했다. 과거의 향수가 남아있는 미래형 도시 모델을 도입하고자 한 것이다. 

 

바비칸은 계획 단계에서 여러 번의 수정작업을 거쳤다. 원래 처음 제안된 디자인은 컬러 패널을 활용한 화려하고 정교한 디테일이 돋보였지만, 굉장히 고비용이었던 탓에 런던시에서 거부당했다. 이후 더 노동 집약적이지만 보다 저렴한 콘크리트가 채택되어 우리가 아는 지금의 바비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런던 대공습으로 인해 파괴된 바비칸 부지 ⓒ Historic England Archive
바비칸의 콘크리트 외벽 ⓒ Barbican

브루탈리즘 건축의 정수

바비칸의 디자인은 단순히 “살고 싶어지는 모던한 고층 아파트” 그 이상이어야 했다. 파괴된 후에도 다시 일어나 회복한 런던, 그 런던의 부흥을 보여주는 하나의 가시적인 상징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년간 지속되었던 공포와 폭력에도 끄떡없는 런던의 견고함. 이를 드러내기 위해 체임벌린, 파웰, 그리고 본이 선택한 것은 브루탈리즘(Brutalism)이었다. 

 

브루탈리즘은 스위스의 모더니즘 건축가인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사용한 재료 기법에서 출발한 용어로, 프랑스어로 노출 콘크리트를 의미하는 베통 브루(Béton brut)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익숙한 철근과 유리 대신 콘크리트를 전면 활용해 대담하고 자유로운 구조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두드러진 입면에서 나오는 강한 조소적인 느낌과 브루탈리즘 특유의 고전적이면서도 미래적인 분위기는 미래형 도시에 대한 건축가들의 비전을 구현하기에 매우 적절했다. 콘크리트의 거칠고 육중한 느낌은 남아있던 기존 성벽, 교회 건물과도 이질감 없이 잘 어우러졌다. 콘크리트를 주재료로 삼을 경우 런던시가 고려했던 예산 측면 또한 만족시킬 수 있었다. 6~70년대에 콘크리트가 널리 보급되어 저렴해진 덕분에 비용 절감의 효과를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용된 브루탈리즘, 그리고 콘크리트의 특성은 부지 주변을 둘러싼 유리 빌딩들 사이에서 바비칸의 존재감을 확고히 할 뿐 아니라 폐허 더미에서 부활하든 솟아오른 바비칸의 역사를 강렬하게 대변한다. 비록 날 것처럼 제련되지 않은 느낌의 외관이지만 단지를 구성하는 디자인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그 안의 흥미로운 유기적인 연결성을 발견할 수 있다. 

 

바비칸의 메인 주거 공간으로는 아파트를 닮은 높은 타워형 블록, 그리고 인공 호수와 사각형 녹지를 둘러싼 테라스형 블록이 있다. 이 테라스형 블록은 주거 공간인 동시에 바비칸 단지 내의 각종 시설들을 연결하는 보행통로의 기능을 수행한다. 3층 높이의 보행통로는 육교이자 계단이며, 상부에 위치한 주민 및 방문객들이 바비칸을 조망할 수 있는 발코니이기도 하다. 이는 보행자를 공중에 띄우고 지상 위 자동차들로부터 분리함으로써 통행의 효율을 높이고 소음 피해를 최소화하는 효과까지 가져온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에겐 미로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정교하고 세밀하게 연결된 이 통로들은 단지 내 구석구석으로 보행자를 안내하며 공간을 남김없이 누릴 수 있게 돕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 통로들이 내부에서만 순환하지 않고, 외부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정문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내로 들어올 수 있는 다양한 경로들을 열어 둔 형태는 바비칸을 폐쇄적인 섬이 아닌 유연하고 열린 공간으로 만든다. 

 

단지 내 디자인은 고대 로마 요새, 프랑스의 모더니즘 스타일, 지중해의 휴일, 북유럽 디자인 등 다양한 곳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바비칸 단지 한가운데에 서면 이국적이면서도 낯설지는 않은, 어떤 공간이라고 단박에 정의 내릴 수 없는 오묘한 풍경에 둘러싸이게 된다. 이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것은 바로 단지를 가로지르는 청록빛 인공 호수다. 호수를 만들 당시, 밑에서 운행되는 지하철로 인해 땅을 더 깊게 파기가 어려워 수심이 얕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얕은 수심 탓에 염색하지 않으면 주변 회색 콘크리트 외벽에 반사되어 지나치게 깊어 보일 수 있다는 문제가 생기자 호수의 물을 인공적으로 염색했다. 안전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지만 청록색 호수는 바비칸 특유의 분위기를 구성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이자 특징이 되었다. 

단지 중앙의 청록빛 인공 호수 ⓒ GardenVisit
외부에서 바라 본 바비칸 센터 ⓒ unsplash

호불호를 넘어 런던의 문화 허브로

건물의 구성요소를 그대로 드러내는 정직함이 대중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던 탓일까? 1982년 공식적으로 개장한 바비칸은 흉물스럽다는 악평에 시달렸다. 2001년 영국 정부에 의해 2급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2008년 미국 CNN방송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흉한 건물 10곳” 중 6위로 뽑힐 만큼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렸다. 그러나 지금은 런던을 대표하는 아이콘이자 글로벌한 랜드마크로 발돋움했다. 경쟁이 치열해 입주하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로 현재 런던 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거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이 배경에는 높은 퀄리티로 제공되는 문화 혜택과 이에 대한 접근성이 큰 몫을 차지한다. 

 

바비칸 아트 갤러리와 콘서트홀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시 및 공연이 이뤄진다. 특히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바비칸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주 공연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대미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바비칸 갤러리는 언제나 아이코닉하면서도 실험적인 전시를 여는 매력적인 기관이다. 그러나 바비칸이 제공하는 예술 공간은 내부에 그치지 않는다. 옥상의 식물원, 심지어 건물 전체까지도 모두 전시공간으로 활용된다. 현재 바비칸 옥상에서는 온실 공간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인도 조각가 란자니 셰타르(Ranjani Shettar)의 대형 조각품 시리즈 <클라우드 송스 온 더 호라이즌(Cloud Songs on the Horizon)>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옷감을 활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예술가 이브라힘 마하마(Ibrahim Mahama)의 작품 <퍼플 히비스커스(Purple Hibiscus)>가 호수 쪽 건물 외벽 전체를 감싸고 있다. 보랏빛 천 위로 수놓아진 가나의 전통 예복들은 화려하면서도 발랄한 느낌을 자아내며 콘크리트 사이로 따뜻한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들도 줄지어 제공된다. 특히 직업과 필드를 막론하고 주목할 만한 인물들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듣는 강연 및 대담회가 주기적으로 열린다. 작가, 아티스트, 영화감독, 방송인, 셰프, 사회 평론가, 운동선수 등과의 만남을 통해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다. 올여름에는 저명한 역사가 메리 비어드(Mary Beard)가 소개해 주는 로마 황제들의 사적인 이야기, 물리학자 가보르 마테(Gabor Maté)가 이야기하는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한 웰빙의 실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전 우주비행사인 팀 피크(Tim Peake)를 통해 듣는 생생한 우주 비행의 경험 등 다양한 강연들이 기다리고 있다. 또한 노숙자의 현실을 탐구한 독백 영화 시리즈 <모어 댄 원 스토리(More Than One Story)>의 첫 공개 상영회 및 작가 맬러리 블랙맨(Malorie Blackman)과의 패널 토론도 기대를 모으는 이벤트 중 하나다. 이 외에도 대중음악을 선호하는 젊은 층을 겨냥하여 유명 디제이들을 초대해 심야 댄스 이벤트를 열기도 한다. 

 

또한 가족 단위로 참여할 수 있는 각종 행사를 통해 인근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며 적극적인 로컬 커뮤니티를 육성하기 위해 힘쓰고 있기도 하다. 다가오는 여름에는 아티스트 프란시스 알레스(Francis Alÿs)의 전시 개관을 기념하여 가족 워크숍이 열린다. 종이접기, 연 만들기, 구연동화 등 다양한 예술 교육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어린이 및 학생들에게 예술적 상상력을 키워주고 가족 간의 유대감을 강화할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상영하는 무료 가족 단편 영화 이벤트도 개최 예정이며 지역 학교의 어린이 및 아티스트들과 협업하여 근처의 커브 갤러리(The Curve) 공간을 재구성한 아워 스트리트(Our Street)라는 이색적인 팝업 공간도 준비되어 있다. 

란자니 셰타르의 <Cloud Songs on the Horizon> ⓒ Barbican
이브라힘 마하마의 <Purple Hibiscus> ⓒ Barbican

선택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의 옵션이 다양해진 만큼 더 많은 관심과 발걸음이 바비칸으로 쏟아지는 중이다. 주거의 공간, 향유의 공간, 그리고 네트워킹의 공간인 이곳으로 유입되는 인구가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땅에서 시민들의 삶들이 놀랍도록 풍성해지는 것을 본다. 바비칸이 보여주는 회복은 새로운 건물을 짓는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 문화와 결합한 공간이 도시에 불어넣는 아름다운 활력에 있다.